[황금 물고기] 도망에서 출발로, 계속 움직일 수밖에 없는 우리
대학생 때 여러번 읽었던 책인데 아둥바둥 살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메일 정리를 하다 예전에 썼던 독후감을 우연히 발견해서 그대로 올려본다. 표현이 다소 유치한 부분도 있지만 그 때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어떤 것이었는지 잘 느껴지는 듯하다.
도망에서 출발로, 계속 움직일 수밖에 없는 우리 : <황금 물고기>
<황금 물고기>. 프랑스의 작가 ‘르 클레지오’가 쓴 작품이다. 생명력이 느껴지는 제목에 이끌려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인생의 힘든 시기에 어쩔 수 없이 삶을 인정해야만 할 때, 그럴 때면 생각이 나곤 하는 책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라일라’라는 소녀이다. 라일라는 그의 본명이 아니다. 어렸을 때 납치당해 팔려온 곳의 주인인 ‘랄라 아스마’가 그가 밤에 왔다는 이유에서 ‘밤’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라일라는 납치당하기 이전의 기억도 없고, 자기의 진짜 이름도 모른다. 자기의 시작도 모르는 채 흘러가는 것이다.
라일라는 랄라 아스마를 자기의 할머니처럼 따르는데, 그곳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아스마의 아들인 ‘아벨’과 그의 아내인 ‘조라’가 그 위험이다. 조라는 시도 때도 없이 라일라를 괴롭히며, 아벨은 라일라를 성폭행하려고 했다. 할머니의 집, 온화한 주인의 집에서도 마냥 평온하게 지낼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의 전반에 걸쳐 이러한 패턴이 계속 반복된다. 편히 쉬어야 마땅한 곳, 지내고 싶은 곳, 한시도 머무르기 싫은 곳 어디든 그를 물어뜯으려는 이빨들이 그곳을 에워싸고 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 패턴은, 이 세상에 우리가 발 뻗고 누울 수 있는 장소가 정말 있을까 하는 작가의 질문 또는 경고라고 할 수 있겠다.
랄라 아스마가 죽은 뒤에 라일라는 그곳에서 도망쳐 나와 근처의 여인숙에서 지내게 된다. 그곳의 사람들은 처음엔 모두 라일라를 친절하게 보살펴 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각자의 생활과 욕심에 그를 끌어들인다. 악의를 가지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말려들게 한 것이다. 결국 라일라는 그곳에서 또래들과 도둑질을 일삼다 적발당해 경찰서에 끌려간다.
경찰서에서는 라일라를 조라에게 보내버린다. 물고기를 상어의 아가리에 던져 넣은 셈이다. 그곳에서 라일라는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밖에 나갈 수 없음은 물론이고, 갖은 폭력과 모욕을 당하고, 그들이 키우는 개와 같은 음식을 먹는다. 그러던 중에 라일라는 운이 좋게도 근처의 사진사 부부 집으로 일을 하러 다닐 수 있게 된다.
사진사 부부는 라일라를 공주처럼, 딸처럼 대해주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남편이 라일라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더니, 성인잡지의 모델 같은 포즈와 의상을 요구했다. 라일라는 역겨움을 느끼곤 그곳을 뛰쳐나오게 된다. 위협은 정직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변태적인 성욕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라일라는 그곳의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고자 프랑스 파리까지 가게 된다.
파리에서 하숙집을 구한 라일라는 병원에서 일을 하며 생활하던 중에 어느 부인의 눈에 들게 된다. 부인은 부유한 신경과 의사였는데 라일라를 딸처럼 여기며 자기 집에서 지내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그 역시 함정, 덫이었다. 부인은 어느 나른한 오후에 라일라에게 약을 탄 차를 먹이고는 그의 몸을 탐닉했다. 부인 역시 초롱 뒤에 몸을 감춘 아귀였다. 결국 라일라는 그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또 다시 떠나게 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책의 전반부라고 할 수 있다. 전반부를 관통하는 주제는 우리의 삶 도처에 퍼져있는 위협과 그로부터의 도망이다. 위협은 바로 얼굴을 들이밀기도 하지만, 위장을 하고 우리를 끌어들인 후에 본색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정확히 가려낼 수가 없다. 의심을 하더라도 나약한 우리는 타인과 관계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함정에 빠진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둘 중 하나이다. 체념하거나 도망치거나. 이야기 속의 라일라는 모든 함정에서 도망갈 것을 택했다. 하지만 위에서도 보았듯이, 아이러니하게도 라일라는 덫에서 덫으로 도망간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체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학습된 무기력’ 실험의 개처럼 전기 자극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일라가 체념하지 않고 도망가기를 택한 것은, 작가가 생명과 삶 그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가?
부인에게서 도망친 라일라는 이전의 하숙집에서 알게 된 친구와 너절한 거리의 차고에서 같이 살게 된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가난과 역경으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라일라는 어느 정도 삶의 패악을 인정하는 듯 했다. 여기서는 인용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젊었다. 돈도 없고 미래도 없었다. 우리는 마리화나를 피웠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지붕과 붉은 하늘과 도시의 웅웅거리는 소음과 해시시와 같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그 모든 것이 바로 우리의 것이었다.’(138p)
삶에 대한 체념도, 맹목적인 긍정도 아닌 직시와 인정.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태나 사건에 대해 긍정하거나 부정하기 전에 그것을 마주보고 이해해야한다. 그래야 각자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나름의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일단 부정부터 하고 체념해버리면 덫에 걸린 채로 고통에 신음하며 피를 흘릴 것이고, 맹목적인 긍정에서부터 시작하면 눈을 가리고 뛰어다니다 또 다시 덫에 걸리게 될 것이다.
차고에서의 생활 중에 라일라는 한 친구의 할아버지인 ‘엘 하즈’와 만나게 되는데, 엘 하즈는 라일라에게 ‘근원’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정확히는 본인의 옛날이야기를 한 것이지만, 라일라는 그것을 자기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자신의 고향이라고 한 번 들은 적이 있었던 ‘힐랄 부족’을 찾아가게 된다.
근원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받아들이기가 참 어려운 것 같다. 작가는 라일라의 모든 도망침과 떠남이 그의 근원을 향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야기 속에서는 북소리와 음악을 통해 그 울림으로써 근원에 대한 느낌을 주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우선 근원에 대한 질문이 필요할 것 같다. 근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에 어떤 가치가 있는가?
책의 마지막 부분과 함께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라일라는 자신의 부족을 찾아간다. 거기서 라일라는 자신의 부족 사람을 보고, 그곳의 땅을 만지면서 어머니의 손을 만진 것이라 묘사한다. 그리고 자신의 여행이 끝에 다다랐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에서는 ‘떠나기 전에 나는 바닷속의 돌처럼 매끄럽고 단단한 노파의 손을 만졌다. 단 한 번만, 살짝, 잊지 않기 위하여.’(276p)라고 말한다. 자신의 근원을 잊지 않지만 결국 떠난다는 것은 여행이 끝나지 않았음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라일라가 근원을 잊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왜 근원이 필요한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근원이 자기의 정체성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라일라는 “그것은 우리가 뭔가 진정으로 원한 적이 없고 항상 타인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했기 때문이었다.”(160p), “나도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178p)고 고백한다. 즉, 진정한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정의를 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붙들어 둘 수 있는 근원을 필요로 한 것이다. 근원은 정체성의 닻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정체성이란 정말 어려운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면 그것이 정말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언어의 과다 공급에서 비롯된 오류이고, 자아란 사실 의식이 빚어낸 허상이며, 나는 그저 빈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들 말이다.
또 이런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허무해지기도 한다. ‘나’를 무엇으로 딱 정의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유의 함정에 빠지기가 쉬운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아닌, 내가 가진 것들은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끔 그곳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감각 기능에 큰 손상이 없는 이상 나와 타인이 적당한 선에서 그것들의 가치에 대해 합의를 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그것들 역시 변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될 것이고, ‘나’의 닻이 되어줄 수 없음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까 위에서 생명에 대한 질문을 했었다. 생명이란 무엇일까? 어떤 것을 정의내릴 때는 그것이 가장 양보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것들과 구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러 가지 정의가 가능할 수 있겠지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내린 정의는 ‘움직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라일라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장소들을 거쳐 가며 움직인다. 그것이 도망일 때도 있었고, 근원을 향한 여행일 때도 있었지만, 늘 있었던 것은 그의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 생명, 움직임으로부터 나 자신 또한 정의될 수 있다. 나는 가장 먼저 생명이기 때문에 ‘움직임’ 그 자체임과 동시에 시간과 공간에 걸쳐 있으므로, 처음의 움직임에서부터 지금-여기까지의 움직임의 총합으로 정의 될 수 있다. 여기서 움직임은 단순한 물리적 움직임뿐만 아니라, 정신의 움직임들, 고민, 질문, 이해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이렇게 정의할 때, 우리는 ‘나’를 z의 시간에서 (x,y)의 공간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없다. ‘나’는 전체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의 위기는 전체적인 것을 단편적으로 보려고 하는 데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생명의 가치는 무엇인가? 왜 삶을 포기할 수 없는가? 이것은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에 종교, 이념, 문화에 따라 수많은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질문 자체가 나 자신의 근원이 되어줄 수 있을 거라는 것이다. 질문은 질문인 채로 그 자리에 있으면서 방향을 제시한다. ‘왜 죽을 수 없는가?’ 라는 질문은 살아야하는 이유들을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찾아보라는 권유 내지 명령이다. 이 질문은 죽음의 문턱까지 들어선 우리를 다시 삶으로 돌려보낸다. 그로써 우리는 다시 움직여 나가고, 생명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황금 물고기”라는 제목을 떠올려 본다. 황금이란 높은 가치를 상징하기도 하고, 생명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황금 물고기는 그 자체로 생명력을 띈 것이면서, 그 움직임, 포식자로부터 도망가고 알을 낳기 위해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등의 움직임으로써 황금빛으로 빛나는 물고기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작가는 우리와 우리의 삶의 가치를 황금 물고기라는 빛나는 생명에 빗대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부터 자기와 삶을 긍정하고 시작하면 진짜 세상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릴 수도 있고 쓰러졌을 때 다시 일어서기 힘들 수도 있지만, 먼저 인생을 마주하고 거기에 자기 나름의 가치들을 부여해 가는 일은 의미를 추구하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10대는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20대는 취업난에 허덕인다. 개인의 차원으로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정체성의 혼란과 더불어 개인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부조리와 고통들이 있다. 우리가 방심한 순간, 우리를 머리부터 집어삼키려는 포식자들이 사방에, 심지어 내 안에도 숨어있다. 우리는 꼬리를 더 빠르게 저어 그들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아니 도망치게 된다. 그럴 때 세상에 대해, 나에 대해, 생명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출발점을 잡는 것은 우리를 도망만 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목적지로 출발해서 나아갈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그 모든 도망과 출발은 우리와 삶을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일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킨다. 그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근원으로 자리매김 해줄 질문들을 건져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우리를 계속 움직이게 하고, 우리와 삶을 찬란한 생명의 빛으로 빛나게 해 줄 것이다. 책의 서문을 끝으로 이만 글을 마친다.
“오, 물고기여, 작은 황금 물고기여, 조심하라!
세상에는 너를 노리는 올가미와 그물이 수없이 많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