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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제가 알아서 할게요

by pathas1126 2022. 5. 1.

요즘 우리는 운동을 하기 위해 PT를 끊고, 그림을 그리려고 태블릿 PC를 산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그렇게 구매한 이용권과 태블릿을 꾸준히 사용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럼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정말 운동을 '배우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서비스와 상품을 구입한 것일까? 그저 환상으로 포장된 상품에 이끌렸던 것은 아닐까? 운동은 내 몸만 있으면 집에서도 할 수 있고, 종이와 연필만 있어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답변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듯하다.

이반 일리치, 허택 역, 느린걸음, 2014

가난의 현대화

이반 일리치는 인류 역사상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현대 사회에서 '가난의 현대화'를 목격한다. 가난의 현대화란 넘쳐나는 시장 상품에 과도하게 의존함으로써 인간의 잠재력과 스스로 사용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 빈약해진 현상을 의미한다. 이 현상은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않으며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상품부터 찾는 사람들에게서 광범위하게 관찰된다. 우리에게 어떤 '필요'가 발생할 때 현대적인 가난을 겪는 사람들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을 검토하기 전에 백화점에 간다. 필요의 충족 방법이 아니라 필요를 채워 줄 상품의 여러 브랜드들만이 고려 대상으로 간주된다. 상품을 찾기 전에 우리 스스로 어떤 시도를 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기 전에 말이다.

 

전문가 집단

가난의 현대화를 부추기며 저자가 거의 악랄한 수준으로 묘사하는 이들은 바로 전문가 집단이다. 여기서 전문가란 전문 지식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정의하고, 그에 적합한 처방을 내리는 서비스 제공자를 말한다. 따라서 의사, 경제학자뿐만 아니라 교사, 미용사도 이에 포함되며 요즘 우리나라로 보면 PT 강사 등의 직업까지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반 일리치가 전문 지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전문 지식은 시민들에 의해 직접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전문가 집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제공되는 필요와 그에 상응하는 서비스 및 상품이다.

주입식 교육의 성지인 우리나라를 한 번 되돌아 보자.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필요하다고 판단된 교육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제공하며, 학원 역시 돈이 더 많이 든다는 점을 빼면 별반 다르지 않다. 정부와 고등 교육 기관에서 입시 제도를 정하고, 학원은 거기에만 부합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며, 학교는 역으로 학원 서비스를 좇아 편협해진다. 이렇게 여러 전문가 집단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배움'은 '입시'로, '스승'은 '강사'로 축소된다.

고등학교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읽다가 담임 교사로부터 "니가 어린 왕자야?"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자율'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참여 여부를 선택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공부의 대상에 대한 자유조차 보장되지 않았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필수로 들었던 수업보다는 오히려 어린 왕자와 여우의 이야기가 더 오랫동안 강렬하게 남아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교육 전문가들은 나의 필요를 입시로 재단하고 소행성 B612에 접근하는 길을 차단하며 국영수 맞춤 교육 서비스를 제공한다.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 배움의 의미는 잊혀지고 공부는 재미 없는 것인 동시에 다시 보상을 필요로 하는 행위로 변질된다.

 

효율성 재고

우리는 왜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필요와 상품을 전제로 받아들이게 됐을까? 저자는 전문가 집단이 필요를 끼워넣는다고 했지만, [무관심의 시대]에서 살펴봤던 자유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필요를 끼워넣으려고 발악을 해도 우리에게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는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말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전문가 집단의 끼워팔기를 '속는 셈 치면서'라도 받아들이는 이유는 '효율성'에 대한 일종의 집착 때문인 듯하다. 전문 지식을 활용해서 스스로 사용가치를 창출하는 것보다는 일단 전문가의 처방을 받는 것을 보다 효율적인 길로 여기는 것이다.

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헬스장에 가서 PT를 끊고 꾸준히 다닌다면 최단 시간에 원하는 몸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혼자 운동을 하게 된다면 근육의 움직임을 스스로 파악하기 전까지는 부상의 위험이 항상 뒤따르며 어떤 운동을 얼마나 해야 하는지, 뭘 먹어야 좋은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 금전적인 비용은 대부분의 경우 PT 쪽이 높겠지만 정보 수집에 드는 시간과 성공 가능성에 비추어 계산하면 결국 PT 쪽이 더 효율적인 선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효율적인 선택을 해야 할까? 언젠가부터 효율이 모든 판단의 제일원리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제한된 자원의 사용에는 당연히 효율이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효율이 아닌 것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도 되지 않을까? '문제(과체중)'-'해결(체중 감량)' 공식과 그를 위한 효율을 '건강'과 '절제'로 대체한다면 굳이 내 활동에 대한 결정권을 타인에게 양도할 필요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건강과 절제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 순간 문제였던 것이 문제가 아닌 것으로 해소되고 자기가 세운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스스로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자연스럽게 강요된 기준이 아닌 스스로 세운 기준을 따를 때 더 오래 그 기준을 만족시키려는 노력을 이어갈 수 있고, 목표를 충족한 뒤에도 공허함 대신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치며

이 책에서 이반 일리치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인간이 상품에 마비되어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조차 망각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 우리는 모든 행동에 상품이 필요하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특정 시점에 발생한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여러 대안을 검토한 뒤 스스로 결정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에 앞서 누군가 나에게 불필요한 필요를 끼워넣으려고 한다면 먼저 이렇게 얘기하도록 하자. 제가 알아서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