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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의 시대] 자유로 무관심의 시대 횡단하기

by pathas1126 2022. 4. 18.

내성적이고 독립적인 성격을 가진 나에게 지나친 개인적 관심은 간섭, 심한 경우 폭력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무관심은 하나의 배려로 느껴지기도 한다. 무관심이 편하게 느껴지고 나 역시 타인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매너로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화창한 봄 날의 서점에서 이 책의 부제를 본 순간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을 새도 없이 책을 집어 집으로 돌아왔다. 무관심이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 강요받은 것이라면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버트야니, 김현정 역, 나무생각, 2019

무관심의 원인

저자에 따르면 무관심은 세상에 대한 실망에서 움트기 시작한다. 세상에 기대를 가지고 꿈도 꾸었지만 그것이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인간은 체념하게 되고, 체념은 자기 충족적 예언을 낳는다. 앞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꿈과 기대, 가치에 대한 믿음이 우리 안을 떠나게 되면 그 빈자리에 바로 '무관심'이 자리를 잡게 된다는 것이다. 이 무관심은 세계에 대한, 삶에 대한, 나의 감각에 대한 무관심이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계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자, 어떤 것에 만족하고 열광하는 능력의 자리를 빼앗은 무관심이다. 무관심한 인간은 그렇게 결핍, 권태, 공허함, 즉 '실존적 공허'에 빠지게 된다.

과학적, 기계적 세계관의 일반화 오류

물리학에서는 전제 조건과 입력값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다면 결괏값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다. 입력값이 에너지라면 결괏값의 에너지는 입력값보다 클 수 없다. 기계의 경우에도 인풋이 아웃풋으로 이어지며, 물리적 자원은 언제나 한정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물리학, 기계, 자원에 대한 세계관을 우리 내부의 감정, 의지, 선의에까지 광범위하게 확장하며 결국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기계적 세계관이 일상에 스며든 대표적 예로는 '기브 앤 테이크'를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브 앤 테이크는 '주고 받는다'라는 상호작용의 의미보다는 '준만큼 돌려받는다'는 양적 의미가 강조되는 듯 보인다. 그렇다 해도 기브 앤 테이크는 요즘 시대에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으며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말이다. 언뜻 생각해봐도 받은 만큼 주게 되고, 준 만큼 받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듯하다. 누가 나에게 선의를 베푼다면 나도 그만큼의 선의를 돌려주려고 할 것이고, 내가 먼저 선의를 베풀었다면 언젠가 그만큼의 선의가 돌아오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마침 오늘 결혼식에 다녀왔는데 나도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오늘의 신랑에게 내일의 하객이 되어주기를 기꺼이 청할 것이다.
'감정 소비'라는 말도 요새 자주 눈에 띄는데 불필요하게 감정 자원을 사용하게 될 때 특히 이 말을 사용하는 듯하다. 불필요한 자원의 사용이 문제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해당 자원의 총량이 유한해야 하고, 보다 효율적인 자원 사용법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 자원이 무한하고 사용 방법도 하나뿐이라면 자원을 어떻게, 얼마나 쓰던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감정 역시 유한한 자원으로 여기며 이를 우리가 원하지 않는 상황에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정 자원은 최대한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즐거운 감정으로써 사용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우리의 감정과 선의가 정말로 유한한 자원이며 동일한 양만큼 교환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까? 예상했겠지만 저자의 답은 당연히 '아니오'이다. 저자는 우리의 감정과 선의가 밖으로 분출될수록 더 많이 생산되는, 무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자원이라고 주장한다. 세계가, 타인이 나에게 먼저 주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임시적 태도'를 벗어나서 내가 먼저 베풀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의무를 느끼고 먼저 손을 내민다면 나의 감정과 선의는 자가증식하며 나아가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상황적 감정 VS 대상적 감정

저자는 감정을 상황적 감정과 대상적 감정으로 구분한다. 상황적 감정이란 일련의 원인들에 의해 구성된 현재 상황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예를 들어 날씨가 우중충해서, 슬픈 영화를 봐서 슬픔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상황적 감정에 속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겠다. 상황적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쾌-불쾌'의 원리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며 쾌를 추구하기 위해 혹은 불쾌를 회피하기 위해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렇다면 대상적 감정이란 무엇일까? 대상적 감정이란 말 그대로 대상, 또는 근거를 가진 감정을 말한다. 막상 들어서는 상황적 감정과 어떤 면에서 구분이 가는 지 확실히 알기가 어렵다. 저자 역시 주체적 관점에서 상황적 감정과 대상적 감정을 매번 뚜렷하게 구분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슬픔과 대조되는 대상적 감정으로서 애도를 제시하고 있는데 애도란 나에게 커다란 가치를 갖는 대상의 상실로 인해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여기서 상실이 원인이라는 사실보다는 애도가 커다란 가치를 갖는 대상과 관계가 있는 감정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커다란 가치를 갖는 대상을 상실했기 때문에 애도는 슬픔에 비해 극복하기가 어려울뿐더러 감정의 강도 역시 훨씬 더 크다. 하지만 저자는 외부의 도움 없이 애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의 특권으로 치켜세우며 애도의 감정을 다룰 때 우리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애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애도의 대상을 통해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데, 우리는 애도의 대상을 상실하기 전에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우리에게 남긴 것을 상기하고 간직하며, 내가 먼저 떠났더라면 힘들어했을 상대를 대신해서 희생을 한 것이라는 의미를 애도에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애도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애도를 극복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달콤한 초콜릿이나 기분 좋은 음악으로 슬픔을 견디는 것에 비해 훨씬 어려운 일이지만, 그만큼 성숙한 극복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상황적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조작에 의존하거나, 감정을 억제하는 등의 방법을 쓸 수 있지만 이는 우리 내부의 감정에 초점을 맞춘 것이기 때문에 주체를 전체 삶에서부터 분리하며 고립시킨다. 반대로 대상적 감정은 대상을 '지향'함으로써 우리를 주체의 편협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무관심, 무감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준다. 상황적 감정과 대상적 감정은 근거의 유무로 차이가 난다고 했지만 감정의 대처 방법에 따라 나타나는 차이가 더 크다고도 볼 수도 있겠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감정들은 대부분 대상적 감정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 가치가 높은 대상과 연관이 있었던 감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절히 대처를 하지 못한 까닭에 아직도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고 안개처럼 떠다니는 기억들이 대부분이다. 당시에는 그것을 상황적 감정으로 여기고 필사적으로 해소하려고 노력했겠지만 정당한 방법이 아니었기에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모양이다. 시간도 많이 지나서 흐릿한 감정들에 확실한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도는 한 번 해봐야겠다.

가치에 대한 의심

책에서는 객관적 가치 체계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으로 무관심을 극복할 것을 독려하는데 가치에 대한 믿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가치 자체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자. 먼저 현대 사회에서는 객관적인 가치 체계를 확립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가치 상대주의가 보편적으로 고려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내가 생각하는 가치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가치가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상존하며 같은 가치라 하더라도 그것을 구성하는 체계에서 합의를 보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가치가 이렇게 분화하는 와중에도 현실이라는 이름 아래 최고의 가치는 하나로 통합되는 모습도 관찰된다는 것이다.
완곡하게 표현해서 그것은 바로 경제적 안정이다. 그 어떤 가치의 실현에도 경제적 안정이 선취될 것이 요구되며, 어떨 때는 유일한 가치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경제적 안정에 앞서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경우 "현실을 모른다", "철이 안 들었다" 는 등의 비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은연중에 나 역시 경제적 안정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객관적 가치 체계에 대한 믿음을 확립할 수 있을까?
지금의 필자가 다루기에는 너무 거대한 질문을 던진 것에 대해 벌써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가치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치를 믿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만 동의하는 가치를 좇아 갔다가 후회하게 될 것도 두렵고, 유일한 가치를 나만 좇지 않았다가 도태되는 상황도 그렇게 반갑게 맞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꿈을 포기하고 결국 취직을 하게 된 지금의 상황만 봐도 가치 추구의 관점에서 본다면 비겁한 선택으로 비춰질 것이다.

과거와 단절된 오늘을 추구할 자유

위에서 제기한 의심을 짊어지고 가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자유'에 대해 생각해보자. 저자는 과거의 자신과 결별할 자유, 상황과 조건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 타인을 향해 손을 뻗을 자유, 가치를 믿어 나갈 자유를 언급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무관심을 이겨내고 행복을 추구해 나갈 수 있는 방법으로 책에서 제시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은 바로 자유의 확립이다. 이 자유는 방자한 자유가 아니라 책임과 결단을 요구하는 자유다. 속박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넘어서 앞으로는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부름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가치를 부정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그런 자유.
또 이 자유는 지난 번에 [사르트르 vs 카뮈] 에서 봤던 카뮈의 '반항'과도 유사한 면이 있는 듯 보인다. 나와 세계라는 두 항을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 날이 갈수록 어렵고 혼란해지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의 동맹을 유지하기로 결단하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책을 읽다보면 인간이 본래 희망을 추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반복해서 강조하는데, 아무리 본성이 그렇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쉬운 길은 아닌 듯 싶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노래를 못 불렀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안 불렀다고는 할 수 없"(13p)을 것이다.

마치며

대학생 때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굉장히 고무됐었던 기억이 있다. 비유가 아닌 죽음의 수용소에서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의미를 찾을 수 있었을까. 소년 만화의 주인공이나 할 수 있을 법한 일처럼 느껴졌다. 다른 차원의 존재나 가능할 법한 일로 여겼기에 실천을 하지는 못해왔다. 하지만 비록 가늘고 길게라도 아직까지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조금의 희망은 가져볼 수 있을 것 같다.🪴